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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초

굥밍 2023. 9. 14. 21:18

https://youtu.be/-CWU-ix-gSA?si=525bL6IR-IfKRM0e


백일초 꽃말 : 죽은 친구를 슬퍼하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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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어김없이 다른 날과 똑같은 아주 일상적인 하루였다.
늘 그렇듯 아이작이 자신을 깨우러 왔고 부장님께 혼난 뒤, 전 날 친 사고에 대해 시말서를 작성하는 그런 뻔하디뻔한 별다를 것 하나 없는 하루였다.

도무지 써지지를 않는 글에 한숨을 내쉬며 잠시 커피를 내리러 갔고 그 곳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부엉이가 자신에게 편지 하나를 던져주고는 바쁘게 날아갔다.
조금 멀어서 자세한 모양을 보지는 못했지만 레이첼의 부엉이임이 틀림없었다.

   “우리 레이가 대체 무슨 일로 나한테 편지를 다—“

        툭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급하게 밖으로 달려나간 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곧바로 편지에 쓰여 있던 주소로 차를 몰았다.
신호도 사람도 다른 차들도 신경 쓰지 않고 달리는 데에만 집중했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하고는 멍하니 입구를 바라만보고 서 있었다.
  -장례식장-

   “..X발, 하하 아르셀 그 개자식이 또 장난치는 거겠지”

장단이나 맞춰주겠다는 생각으로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 끝에 작은 방이 나왔고 그 안에는 아르셀리아와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화를 억누르며 아르셀을 향해 욕을 한바탕 쏟아내려던 순간 처음 보는 망연자실해버린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영혼이 나가버린듯한, 그 공허한 표정이 이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흔들리는 몸을 이끌고 관 쪽으로 다가갔고 그 안에 누워있는 눈을 감은 레이첼의 몸을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지며 주저 앉았다.

   왜 너가, 아니 그보다 대체 왜, 어떤 찢어죽여버릴 놈이 너를. 죽어버린거 아니지 레이? 그냥 잠이 든 것 뿐인 거지? 제발 일어나, 날 두고 너가 혼자 갈 리 없잖아, 너마저.장난치지 마 제발 레이첼. 레이첼. 레이첼

수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고 이내 그 번잡함이 분노로, 분노는 저편에 사형수 마냥 처연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앉아만있는 레이첼의 남편, 아르셀에게로 향했다.

   “대체 레이가 죽을 때 뭘 하고 있었던거야 넌?”
그렇게 행복한 척 꼴값을 떨더니 레이첼 하나 지키지 못한 그가 끔찍스럽게도 증오스러웠다. 저딴 자식 학창 시절부터 마음에 든 적 없었는데.

   “너가 뒤졌어야지. 레이첼보다 너 같은 게..“
차마 말을 끝까지 잇기도 전에 작은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빛나는 백발, 왼쪽 눈 밑에 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
누가 봐도, 그리고 역겹게도

   “지 애비랑 똑같이 생겼네.”

감정을 나름대로 잘 숨기는 자신이였지만 그러지 못한 건지 아니면 하지 않은 것인지 대놓고 얼굴을 구기며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차갑게 녀석을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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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하늘에 떠 있는 해에도 시린 공기가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도 챙기지 않은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고 이상하게도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자신에 드디어 인간성 마저 상실한건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입에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한때는 레이첼 때문에 끊었었던 때도 있었는데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피웠던 본인 옆에 슬며시 다가와 비눗방울을 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본인 딴에는 담배를 피우는 시간마저도 함께 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그런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결국 담배 대신 비눗방울을 사들고 와서 같이 불어 대던 때를 회상하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불이 붙지를 않는 라이터를 괜히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져버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차가운 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아 인센디오를 외치려던 순간

작은 하얀 손이 뭔가를 쑥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아르셀 놈의 아들로 보였던 꼬맹이가 자신을 바라보다가 그 작은 입을 열었다.

   “담배는 몸에 나빠요. 대신 이거 드릴게요.”

받아들고 보니 그건

   작은 비눗방울이였다.


놀란 눈으로 아이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자 그제서야 레이첼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고 말투마저 그녀와 꼭 닮은 것을 보자마자 그제야 무언가 막혀 있었던 것이 뚫린 듯이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처음 보는 어른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고 그런 아이를 끌어 안고 한참을 목 놓아 울며 레이첼의 이름을 삼켰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여린 손을 느끼며 이 아이가 레이의 아이가 정말로 맞다는 생각에 눈물을 닦으며 아이의 손을 이끌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모랑 상점에 좀 가자.”
   “네?”
   “이모가 너희 엄마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그래.”


간식 앞에서 눈을 빛내는 모습에서도 영락없는 레이의 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에 홀린 듯이 아이가 잡아보는 물건을 있는대로 쓸어담아 결제를 한 뒤 아이의 품에 잔뜩 안겨주었다.

아이를 워낙 싫어하는 자신이였기에 레이첼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일부러 일 핑계로 가지 않고는 하던 과거가 미치도록 후회되어 비통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함이 입안에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자주 가보는 건데

레이첼이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이렇게 예쁜 너를 닮은 아이인줄 알았다면 아이가 좀 더 크면 가봐야겠다는 계획 따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작이 아이를 보러 갈때 함께 가자고 했을텐데.

아르셀의 외모를 닮았다는 사실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레이첼의 성격을 꼭 빼닮은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겨 버린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해주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급하게 달려오느라 어떤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온 그녀에게 부장의 하울러가 날아와 당장 돌아오지 않는다면 시말서를 5장 더 제출하게 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아이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만을 적어서 주며 나중에 보자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급하게 차에 올라타야 했다.

마법부로 돌아온 그녀는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의 장례식에 다녀온 그 시간이 마치 꿈 속에서 겪은 일인 것만 같아 자신의 책상을 돌아본 순간 레이첼의 부엉이가 두고 갔던 부고를 전하는 편지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간신히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보고싶어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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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다녀온 지도 일주일이 넘은 시점에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아와 편지를 전했다.
별 생각 없이 편지를 열자 그 안에는—

아르셀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밑에 있던 쓰레기통에 처 넣은 후 일에 집중하려 책상을 정리하고 일을 모두 마친 후에는 그냥 집에 돌아가 잠을 청했다.

사실 아르셀리아가 죽어버릴 거란 걸 그 놈의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을 보았을 때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냥 콱 죽어버리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않고 돌아왔지만


며칠이 지난 후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고 아르셀의 소식 이후로 쭈욱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서 인지 예민해진 청각으로 그것들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나중에 아이작에게 들은 바로는 자살이라고 했다. 끝까지 이기적인 행동에 치가 떨려왔다.

   설마 했는데 진짜 죽어버릴줄이야

전 날 퇴근길에 사다놓은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차를 몰아 한 묘지 앞으로 향했다.
우산도 없이 내리는 것들을 온몸으로 맞아 뜨거워지는 머리를 조금이나마 식히며 눈앞에 있는 두개의 묘비에 적힌 이름을 한글자 한글자 훑어보다가 손톱에 손바닥의 여린 살갗이 찢어져 피가 맺히도록 손을 꽈악 쥐었다.

아르셀리아 베르너, 레이첼 베르너

차가운 공기보다 더욱 차가워 손 대기만 해도 뼈마디가 시려오는 레이첼의 묘비에 자신의 손에 맺힌 피를 이용해 ‘베르너’ 라는 성에 두 줄을 긋고 그 위에 그녀의 본래 성이였던 ‘미케일라’ 를 적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레이.. 미안해, 거기서는 편하게 쉬어. 넌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였으니까 그 곳에서도 모두에게 사랑받을거야.”

그리고 아르셀—

그의 묘비를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담아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직했다.

   “애는 어쩌라고 너 혼자 죽고 X랄이야, 책임감 없는 자식. 하긴 너 같아도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레이보다 널 닮은 자식이라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던 거냐?”

헛웃음이 나왔다.

   “자격 없는 놈, 너 같은게 레이첼이랑 결혼하겠다고 설칠 때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레이는 대체 네 어디가 좋다고…”

사실 이미 알고 있다. 아르셀은 그 누구보다도 레이챌을 사랑했고 심지어 자신보다도 레이첼을 사랑해버린 나머지 목숨까지 버리고 레이를 따라간 것일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그의 헌신적인 사랑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내어준 레이첼이였겠지.

   “..멍청한 X끼야… 레이첼이 퍽이나 널 하늘에서 만나고 좋아하겠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게 하늘에서 내린 건지 눈에서 나오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고 추위에 얼어 새빨개진 손으로 아르셀의 묘비를 몇 차례 내리쳤다.

   “뒤지긴 왜 뒤져. 그래도 난, 난 너가..”

   정말로 죽기까지 바란 건 아니였는데

묘비에 긁힌 손에서 붉은 피가 방울방울이 바닥과 묘비 위로 떨어졌고 시간이 흘러 그 피가 그치고 떨어져 있던 것들과 묘비에 있던 피까지 비에 쓸려 거의 지워졌을 때 즈음에야 차로 돌아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

둘의 묘지 앞에 백일초 꽃다발을 하나씩 놓아둔 뒤 다 젖은 그 상태로 차에 올라타 핸들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사실상 악에 받친 절규에 가까웠던 울음이 점차 사그라들었을 때 시간을 확인한 후 그 상태로 출근을 하러 마법부 쪽으로 차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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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상태를 보자마자 부장은 말없이 조퇴증을 내밀었고 집으로 돌아와 젖어서 무거워진 몸을 침대에 던진 뒤 천장을 향해 상처난 손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참 많은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겪었으며 그때마다 고통스러워 한 자신이였지만 레이첼과의 이별은 과거 가족들의 죽음 만큼이나 거대하게 다가와 자신을 짓눌렀다.

추운 날씨에 젖은 상태로 밖에서 한참이나 울고 들어와 몸살이라도 오는건지 평소와 같은 온도의 집임에도 공기가 한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며 아르셀리아와 사랑하는 레이에게 조용히 정말 마지막이 될 작별인사를 건네며 꽤나 오랜 시간 동안이나 탁자 위에 놓아둔, 레이의 아이가 건네준 그 비눗방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